“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중략)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어느 먼 산 뒷옆에 바위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어두워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시인 백석(1912~1996)이 1948년에 발표한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 方)’의 일부다. 외로움과 절망, 부끄러움 속에 괴로워하고 방황하던 시적 화자가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 어떤 섭리와 깨달음에 다가가는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 시의 제목은 ‘남신의주 유동에 사는 박시봉 집에서’라는 편지 발신지를 뜻한다. 작품의 배경이 된 신의주는 어떤 곳일까.
신의주는 평안북도의 서쪽 끝 압록강 하류에 있으며 다리를 사이에 두고 중국 단둥과 마주 보고, 남쪽으로는 룡천군과 맞닿아 있다. 일제 강점기 계획된 신도시로 출발했기에 도로가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하게 구획되어 있으며, 지금은 도(道) 행정과 교통의 중심지이자 북·중 경제협력 특별지역으로 기능하고 있다. 고려 말 이성계가 회군했다는 위화도를 관할에 두고 있고 조선시대 사행단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 역할을 하기도 했다. 러일전쟁 후 1906년 서울 용산에서부터 신의주 간 경의선 직통 운행이 시작되었는데, 분단 후에는 평양-신의주 구간이 평의선으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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